“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독후감
본서의 저자인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휘튼 대학,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예일 신학원을 졸업하고, 휘튼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1952년부터 1984년까지 약 30여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년부터 1982년 까지는 학장을 역임하였다. 클라우니 박사는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여러 신학교와 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강의도 하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버지니아주에 살다가 2005년에 소천하였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하는 글로 가득차 있고 예수님의 예표가 도처에 있다. 그것을 이 책을 통하여 공부할 수 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 목사는 한발 더 나아간다. "언약궤 위에 아무 형상도 없다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이시라는 것을 배워야 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기계시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원하거나 상상한 대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언약궤 위의 빈 자리는 장차 오실 분을 위하여 예비되었습니다."( 본서 P26)
에드먼드 클라우니 목사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 연구를 통하여 성경해석의 오류와 잘못된 신앙관을 짚어준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인간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에 닿으려고 노력한 바벨탑과 다르다는 것을 적시하고, 참종교는 인간의 요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환기시킨다. 자신의 노력으로 탑을 세우고 성전을 세우며 자신들의 상상대로 우상을 만들어 멋대로 숭배하는 인간의 반역을 지적하며 "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자기들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수천억원을 들여 예배당 건물을 지어 놓고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표절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목사에게 오랫동안 엉터리 설교를 들어왔던 사람들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존 위클리프는 성경을 번역하고 "성도들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외쳤다. 엉터리 신앙서적을 만들어 교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목사들은 물러가고 에드먼드 클라우니처럼 치열하게 성경을 연구하여 교인들에게 말씀의 양식을 공급하는 목사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업을 주시라고 기도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으시기를 간구한 모세, 이를 우리에게 소개하는 에드먼드 클라우니 목사가 고맙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기도의 참모습이다. 추천의 글에서 제임스 패커가 표현한 대로 이 책을 읽노라면 머리가 맑아지고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처럼 마음이 뜨거워진다.
본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여호수아, 다윗, 선지자들 등 구약성경에 나온 인물들의 삶을 살펴가며, 자칫하면 구약성경에서 잘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술하였다. 본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라는 문구로 글 문을 열고 있다. 특별히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저자의 구속사적 믿음은 상당히 정통적인 칼빈주의의 바탕을 두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하며, 4복음서중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예로 들었는데, 요한복음의 맨 첫째절 즉,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라는 단어에 포커스를 맞추며,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약에 국한 된 것이 아닌, 이미 태초에 이 이야기는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창세기 3:15절의 ‘여자의 후손’을 언급하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과 동시에 이미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는 가장 정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는 본서의 목적을 “성경의 중심이 되는 줄거리를 따라, 핵심적인 사건들을 취하여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첫 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밝히며, 인간의 참된 가치를 잘 설명하고 있는데, 특별히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되, 하나님의 형상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피조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의 부연설명으로는 인간은 어떠한 남신과 여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도 아니며, 죽임을 당한 어떤 신의 피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어떤 신의 일부도 아니요, 신과 짐승의 결합체도 아닌, 정확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상당히 성경적인 하나님의 뜻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특별히 이견을 달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창조부분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그리스도라고 알고 있고 신약성경 속에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들을 듣고 말한다. 가끔 구약의 내용도 있다. 이사야 53장이나 유월절 어린양의 피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보곤 한다. 그리고 예언과 성취를 살펴볼 때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비교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몇 가지 내용 이외의 대부분을 십자가와 상관없이 읽어 내린 것이 사실이다.
빌헬름 부쉬는 이에 대해 구약에 숨어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 준다. 에덴 동산에서 시작해 보자. 사람이 범죄한 후 에덴에서 추방당할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다. 범죄 후 죄없는 동물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한다면 거기서 십자가를 읽을 수 있다. 우리 죄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옷을 볼 수 있다. 다음은 노아의 방주를 보자. 방주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위험에 대한 구원으로 보인다. 십자가 역시 하나님의 진노라는 상상해 낸 위험에 대한 비현실적 구원논리로 비친다. 쨍쨍 비치는 햇빛 아래서 그런 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자는 안전한 방주 안으로 취해진다.
구약에서의 십자가 읽기는 계속된다. 최초의 죽임 당한 사람인 아벨의 피, 아브라함에게 새 힘을 주기 위해 그 당시 풍습과 다르게 가져온 멜기세덱의 빵과 포도주, 모리아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독생자 이삭, 야곱에게 열려진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 하늘의 문, 신부 라헬을 위해 종 되었던 야곱의 모습, 세겜의 상수리나무에서의 옛것의 매장, 미움과 시기로 인한 죽음의 길이 사람들을 위한 축복의 길로 변한 요셉의 생애,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만든 기이한 나무, 보증인으로서 한계가 있었던 모세, 아사셀을 위한 어린양, 대속죄일의 대제사장,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있던 아론, 목마름을 해결해 준 반석, 바라보는 것으로 나음을 얻었던 놋뱀, 하나님이 정한 경계인 세겜의 도피성, 하나님이 내신 길에 대한 증거인 길갈의 기념비, 붉은 줄이 매여진 구원받은 기생 라합의 집, 저주와 죄와 올무가 놓였던 아골 골짜기, 죽음으로써 죄를 죽인 삼손, 미스바에서의 번제, 피난처 아들람 굴, 잃어버린자를 찾은 다윗의 탈취,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하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권속,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하나님을 발견한 호렙산의 엘리야, 너무 간단하고 우둔해 보이는 방법으로 치료받는 나아만, 도끼를 떠오르게 했던 요단강가의 나무, 시체를 회생시킨 엘리사의 무덤, 대제사장과 재물, 재앙이 끝나는 경계로서의 오르난의 타작마당, 언약의 회중의 구심점인 시은소, 그리고 유월절의 어린 양.... 그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에 대해 비유와 이중적인 성경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면 안된다는 비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 견해로는 이 책이 성경본문이 말하고 있는 객관적인 사실을 관찰하고 정리해 내는 귀납법적 연구방법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고 보인다.
그것이 지나치면 구약의 내용을 십자가와 기계적으로 연결시키는 독서법으로서의 위험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든 방법 자체에 치중하면 잣대가 가진 도구적 한계에 빠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책의 저자가 구약을 읽는 방법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신약의 저자들이 먼저 구약을 그렇게 읽어 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신령한 음료를 내는 반석으로서의 예수님, 놋뱀처럼 들려진 예수님....
저자는 구약이 우리에게 닫혀 있는 텍스트가 아니기 위해 구약 속에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이라는 창을 통해 이삭이라는 창을 통해 또는 요셉이라는 창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보는 일이 될 것이다. 구약읽기를 더욱 더 풍성히 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