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 서 론
- 본 론
- 성에 관한 이해
- 역사적 배경
- 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
- 성경과 성
- 결혼에 관한 성경적 이해
- 혼전 순결
- 성경과 결혼
- 이혼과 재혼
- 동성애 문제
-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입장
-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역활
- 사회 문제로서의 동성애
- 결 론
참고 문헌
제1장 서론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성(性)에 대한 논의는 금기(禁忌)시되어 왔다. 한국의 일반 교육은 오랫동안 성교육을 무시하였다. 교회 안에서도 성(性)에 관한 성경적 혹은 기독교적 이해를 위해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1970년대에 와서 청소년들의 성문란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자 성교육(性敎育)이 ‘순결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성(性)문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性)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닐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혁명적이고 개념적인 근본 변화를 우리는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라고 부른다. 예를들어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에 중세시대의 가내수공업에서 기계공업의 대량생산 체제로 바뀐 것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일컫는다. 요즘은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또 한번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정보기술의 발전은 모든 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에 기여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 특히 성윤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인터넷 상으로 온갖 음란물이 범람하여 청소년들에 대한 성적인 타락을 유도하는 부작용이 수반 되기도 한다. 요즘에는 동성애자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등 사회적인 분위기도 변하고 있다. 신명기 22장 13절에서 30절까지는 순결에 관한 법이다. 성경대로라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순결을 지키지 않음으로서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하다. 무엇이 옳은지 혼란스럽다. 결혼하지 않은 기독교 청년의 절반 이상, 즉 남 59% 여 44%가 성 경험을 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발표 되었다. 기독교교육적인 측면에서 성윤리에 대한 적절한 재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사료된다. 세상은 변하지만 성경은 불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감히 변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얘기였다. 다만 적용하는데 있어서 해석적 방법이 시대적인 상황에 맞게 달라져야 할 필요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본 논문에서는 성(性)에 관한 올바른 이해와 현실적인 적용을 위해 기독교교육적 입장에서 올바른 성윤리에 관하여 논하고, 특히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성경적 입장과 교회의 역활 및 사회적인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제2장 본론
- 성(性)에 관한 이해
- 역사적 배경
수세기 동안 지배적인 신학이론은 인간의 성에 대해 기능적 성격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즉 인간의 성을 출산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였다. 오늘날 성은 인간의 본질적 결정 요소 가운데 하나로 다루어지고 있다. 인간을 전체로서 보는 관점을 통해 성은 재평가되고 그 의미가 새롭게 파악되고 있다. 루터는 성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로 보았다. 인간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따라서 한 성이 다른 성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작품(God's good work)이다.
오늘날 에로티시즘은 20세기말의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어떤 시기에 유럽 문화 가운데 에로티시즘의 물결이 있었다고 한다. 그 물결이 매우 강력한 형태로 1950년대에 다시 나타났다. 그 물결은 줄어들 징조를 보이지않고 있다. "성은 가장 값싼 일반적 쾌락의 원천이 되어서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수준에 놓이게 되었다." 인간의 죄악은 이제 성의 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죄의 영향으로 성문제에 있어서 균형을 잃었다.
우리의 성적 활동은 우리의 전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무제약적인 성관계는 인간의 삶을 공허하게 하고 불만스러운 것이 되게하며 점점 더 인간을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 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성(性)을 주제로 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성에 관한 많은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성문제를 다룬 저서들도 많이 나왔다. 그 책들은 인간의 성문제를 사회심리학적 인간상호 관계의 차원에서 연구하였다.
공립학교에서의 성교육은 이전보다 더 보편적이다. '70년대 후반기에 미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에 뿌리내린 성교육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의 성문제에 대한 보다 공개적이고 책임있는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남녀평등의 문제도 전면에 부각되었다. 여성운동은 여성에 관한 일반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서구사회의 경우, 성을 죄악시하거나 필요악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사라졌다. 물론한국에는 아직도 성문제와 관련하여 전통적 이해와 태도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성문제를 금기사항으로 취급할 수 없다. 성이 상품화된 현실 속에서 이를 금기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나 교사는 어린이들과 학생들에게 성에 관한 많은 질문을 받는다. "그런 것은 묻는게 아니야." 라고 회피하는 것은 옳은 응답이 아니다. 성은 부끄러운 것이나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물임을 가르쳐야 한다.
- 성경과 성(性)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인 성(性)은 선하고 신성한 것이다. 성은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을 두려움이 아니라,감사의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발견되는 성문제의 모순은 타락의 결과이다. 또한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죄된 의지의 탓으로 여겨진다.
성은 여러가지 면에서 불과 같다. 성은 귀중하게 생각되고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그것은 손상과 파괴를 가져올 것이다. 오토 파이퍼에 의하면, "성은 인간의 전체적 자아 기능의 하나이다. 인간의 성적 활동은 그의 인격 형성을 표현해 주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특별계시인 성경에서 성과 결혼에서의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인간의 성(性,sexuality)의 의미는 하나님의 여자 창조의 기사 안에 나타난다(창 2:4-24). 이 본문은 상호관계 속의 남자와 여자의 가치와 중요성을 특별하게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남성의 성적 상대역인 여성을 창조하셨다.
정정숙 교수는 ‘성교육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성에 대한 성경의 이해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 좋았다. 그런고로 성도 좋은 것이었다. 성은 그 자체로서의 좋은 것 외에도 하나님의 다른 신적 축복인 자녀 생산의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자녀를 생산케 하시며,그 자녀들을 축복의 후계자로 삼으셨고,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실현토록 하셨다. 구약은 성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성에의 욕망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안에서 사용하여야 하며,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실현시켜야 한다."
월터 카이저(Walter C.Kaiser)는 ‘구약성경윤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성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어떤 두려운 힘이 아니다. 또한 도덕이나 종교 범주 및 관심을 벗어난 세상적인 어떤 충동도 아니다. 도리어 성경은 태초부터 성을 '좋다'(선하다)고 하였고 하나님의 선물로 인정한다."
피조물에게 첫번째로 시달된 명령은 인간의 생육에 관한 것이었다(창 1:28). 결혼제도는 이 명령과 밀접하게 연관된 제도이다(창 2:23,24). 결혼은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성경은 이 결혼으로 시작된 관계를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성에 관한 성경의 견해는 두 가지 근본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나는 성의 신비에 관한 경외감이요,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성적 관계에의 목표로서의 결혼을 신성화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성에 관한 기록이 많지만,성을 표시하는 단일한 어휘는 없다. 성에 관한 성경의 언급은 매우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물론 성관계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기 위해 완곡한 우회적 표현을 쓰고 있다.
‘아가서’는 이 주제를 상술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전통적으로 아가서 해석의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일반적으로 에표론(typology)의 입장에서 해석하여왔다. 예를 들면,박윤선 박사의 아가서 주석과 석원태 목사의 아가서 강해가 예표론을 따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아가서의 입장은 순수한 부부간의 사랑까지 반대한 일부 초대 교부들의 입장과는 반대이다. 아가서의 인물들은 참으로 서로에게 연모와 온전한 매력을 느낀다. 아가서는 사랑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아가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육체적 사랑의 기쁨을 찬양하는 일련의 연시(戀詩)로 이루어져 있다. 아가서에는 "두 사람의 성적인 사랑의 체험이 아주 다양하고 서로 다른 관점들로부터 다루어지고 있다". 아가서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고,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사랑을 다소간 상기시키고 있다.
성은 결혼관계에서는 순결하고 거룩한 것이다. 성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역할 내에서 그 기능을 발휘할 때에는 수치스럽거나 죄악된 것이 하나도 없다(B.C.Hostetter).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은 ‘순결’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즐겁고,자연스럽고 생기있고,한가롭고,창조적이며,연인들이 서로를 위해 창조를 경험함으로써 배운 특별한 환희로 가득차 있다. 서로에게 완전히 순종한 두 사람이 자신들을 서로 주고 받고 찬미하는 창조적 사랑과 표현의 은밀한 작은 세계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은 없다. 바로 이 찬미, 감사, 기쁨의 영혼 속에 진정한 순결이 존재한다. 올바르게 이해된 성적 결합은 인간의 깊은 사랑의 표현이며 그 사랑을 깊게 하고 완전하게 하고 신성하게 하는 수단이다. (‘존재하는 것과 행하는 것’ 중에서).
- 결혼에 관한 성경적 이해
혼전 순결
- 하나님이 태초에 계획하신 남녀간의 성의 영역은 거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오직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듯 마찬가지로 우린 한 사람만 사랑해야한다. 그리고 그 한사람을 위해 선물로서 순결을 간직해야 한다. 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다른 사람이 먼저 풀어 보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호기심이 간다고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준비한 선물에 절대 손을 대면 안된다. 그것은 정말 큰 죄이다. 다른 사람 선물을 풀어보는 사람은 정말 무례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가슴에 숯불을 안은 것처럼 큰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를 구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하지만 죄 값은 치루어야 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도 벌을 받아 그 가문에 칼이 쉬지 않았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은 큰 괴로움 속에 있었으며 아끼는 갓난 아기가 병으로 죽게 되었다. 육적인 순결을 잃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적인 순결을 잃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다.
하나님은 혼전순결을 중요시하신다. 혼전순결은 이웃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과 결혼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싸워서 헤어지는 커플도 많고 심지어 결혼식장에서도 사이가 깨져서 헤어지는 커플도 많기 때문에 결혼할 사이라고 섹스를 한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내가 지금 사귀는 여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될 여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혼전순결은 이웃사랑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참된 법인 것이다.
성경과 결혼
- 결혼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다음 구절에 요약되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 이 구절은 주님과 사도 바울에 의해 인용되었다(마 19:5,엡 5:31).
그랜버그(L.I.Granberg)에 의하면, "결혼은 '독점적인' (exclusive) 관계를 지닌다." '한 몸'이란 개념으로 이해되는 두 사람 사이의 육체적,감정적,이지적,영적인 완전한 일치란 일부다처제(polygamy)를 배척한다. 그에 의하면,결혼에 관한 성경적 입장에 있어서 신약성경이 주로 기여한 내용은 결혼의 불가분설(indissolubility)과 여성의 동등성(equal dignity)에 대한 기본적 원리를 강조했다는 점이다(갈 3:38,고전 7:4). 결혼은 여자를 남자와 함께 동등한 이격적 존엄성의 위치로 올려 놓음으로 진실로 '한 몸'이 되는 것이며, 이 표현에 내포되어 있는 연합이란 의미는 두 사람 각자가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엡 5:22,23)은 '기능'상의 위계질서를 말함이지 존엄성이나 가치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에 있어서 책임의 순서와 권위를 정하셨는데 이는 창조의 순서에 따른 것이었다.
이혼과 재혼
- 이혼에 관계된 가장 중요한 본문은 신명기 24장에서 발견된다(신 42:1-4 참고).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오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이 모세의 규정은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은 인간의 악함과 마음의 완악함(마 19:8)에 대한 양보적 규정이었다. 그 규정은 창조 때로부터의 인간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존재하던 관습을 조정하고 완화하는 것이었다. 1절에 언급된 '이혼증서'는 분명히 그 여자의 재혼권리가 포함된 권리들과 평판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수치되는 일'(something indecent)의 의미는 많이 논의되어 온 주제였다. 이미 예수님 당시에 랍비들의 견해는 나뉘어져 있었다. 보수적인 삼마이파는 음란한 행위로 보았다. 반면에 힐레리파는 남편을 화나게 만드는 일로 보았다. 여기에는 음식을 망치는 사소한 일까지 포함되었다. 필로와 요세푸스는 힐레리파의 견해를 알고 있었고,이에 동의하였다. 이 율법에 대한 허용적 해석은 분명히 1세기 유대교 안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수님은 이 입장을 날카롭게 비판하셨다. '수치되는 일'은 간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은 간음에 대해 사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레 20:10). 죤 머리는 신명기 32:14에 근거해서,행위의 음란함이나 부도덕성으로 보았다(some shameful conduct connected with sex life). 아벨 아이잭슨(Abel Isakkson)은 그 여자가 자신의 벗은 몸을 -자발적으로 혹은 비자발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다.
말라기 2:10-16은 이혼과 관련된 구약성경의 중요한 구절들이다. 그 본문은 이종족간의 결혼과 이혼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당시에 그 문제는 심각한 것이었다. 어떤 학자는 본문의 이혼을 여호와에게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다. 본문의 이혼은 문자적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라기는 결혼과 관련하여 신학적 틀을 제시해 준다. 비록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 아래서 이혼을 관대하게 다루셨지만,하나님께서는 이혼을 초래하는 죄된 상태를 미워하신다. 본문에서 말라기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까지 올라 가며,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다보고 있다(마 5:31,32).
'음행한 연고 없이'에서 '음행'(porneia)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부 로마교회 학자들은 이 용어가 모세의 율법에 금지된 근친의 결합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학자는 혼전의 성적 불성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혹은 '지속적이고 회개하지 않는 간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마태는 '간음'을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마태는 간음과 음란을 구분하고 있는 듯 하다(마 15:19). 신약성경의 용법에 비추어 볼 때,'모든 종류의 비합법적인 성행위'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음란함으로 볼 수 있다. 이 단어는 간음을 포함하나,그것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바울은 근친상간(고전 5:1)과 창기와의 성관계(고전 6:13)와 관련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비합법적 성행위는 혼전의 성적 부정과 동성애(레 18:12,롬 1:26-28) 그리고 수간(레 18:23)을 포함할 것이다. 이러한 성적 부도독의 행위는 한 몸의 원리를 범하는 것이다. '한 몸의 원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의 연합과 배타성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이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발견된다(7:10 이하). 10,11절의 문맥을 볼 때,동사 '코리조'('가르다'를 의미함)는 분명히 이혼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방인의 경우 여자가 이혼 문제의 주도권을 쥐는 법적 권한을 갖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문자적의미는 'has not been enslaved')라는 말씀은 재혼이 자유롭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J.J.Davis).
불법유기의 문제가 여기서 등장한다. 믿지 않는 남편(아내)에 의한 불법유기(내버림)의 경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혼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결과로서 재혼할 수 있다. 그것이 본문의 결론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이러한 유기를 구성하는가? 배우자의 물리적 유기와 장기간 가족을 버려두고 떠나있는 것은 분명히 그러한 유기의 조건에 속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낭비벽과 일콜 중독과 재정능력의 결함 혹은 혼인상의 의무 불이행에 까지도 적용될 수 있는가? 데이비스에 의하면,심각한 경우에도 교회는 이혼을 고무시키지 말아야 한다. 병이나 신체적 무능력으로인한 혼인상의 의무 불이행도 유기를 구성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 이혼은 언제나 죄된 인간의 태도와 행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기독교 지도자는 이혼을 격려하거나 고무할 수 없다. 동시에 성경은 모든 이혼이 예외없이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재혼에 있어서, 피해를 본 사람은 재혼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면 이혼의 책임(잘못)이 있는 쪽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한 사람도 합법적으로 재혼할 수 있는가? 만일 그가 회개하고 과거에 수행하지 않은 인간적 재정적 의무를 회복하려고 참으로 시도한다면 긍정적인 답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참된 회개란 하나님 보시기에 새출발하는 것이요, 과거의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요,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그를 용서해주셨다면,교회는 더이상 그 '잘못한'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그는 무죄하다. 물론 교회는 변화된 삶과 태도를 지켜봄으로써 그 회개가 참된 것이라는 근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또한 재혼에 앞서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결혼의 성경적 표준을 제시하는 상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회개와 죄사함 그리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 이혼한 사람은 과거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
III. 동성애 문제
-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입장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본다면 동성애는 한마디로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성경에서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분석적 언급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전혀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이나 바울의 글 속에서는 동성애에 대하여 강한 정죄의 입장이 들어있다. 구약성서는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 기사는 명확하고 또 직접적인 동성애에 대한 이해의 예로서는 충분치 않다. 이에 더하여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동성애가 인정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 두사람 사이의 관계는 확실히 동성간의 친근함과 로멘스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이야기 역시 명확한 예라 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밖에 구약성서에는 특히 레위기 18장 그리고 20장 두 곳에 동성애를 명백히 금하는 언급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동성애 한가지만을 비난하고 금한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성적 불륜을 금하는 항목 중의 하나로 들어가 있다. 여기서는 특히 남성 동성애주의자의 경우를 예를 들면서 가증한 일, 죽임을 받아야 할 이들로 규정하고 있다.
동성애는 모세의 율법에서 강하게 정죄받고 있다(레 18:22,20:13). 동성애에 대한 신약성경의 금지는 세 곳에서 발견된다(롬 1:26,고전 6:9,딤전 1:10). 성경은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모든 종류의 육욕을 정죄한다. 성경은 일관성있게 동성애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구약신학’에서 차일즈(B.S.Child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성애의 행위에 대한 성경의 개방성 보증이 아니라는 것을 찾으려는 최근의 몇몇 신학자들의 시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구약의 이해와 엄청난 불일치를 보이는 것이다. 그 신학적 문제는 그러한 행위를 정죄하는 몇몇 본문들을 인용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레 20:13). 구약은 끊임없이 이성간의 도착적인 사랑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의도의 외곡을 증언한다(삿 20장, 삼하 13장). 마찬가지로 구약은 동성애를 축복 바깥의 그늘로 떨어지는 창조의 왜곡으로 본다. 교회는 이 근본적 가르침을 양보할 수 없다. 동시에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동성애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는 죄된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명백하게 제시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하신다.
-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역활
동성애에 관한 논의는 그 원인을 찾는 일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 있었다. 혹자는 이 논의 자체를 결론이 없는 논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의 동성애자들이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동성애를 생득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틴 호프만(Martin Hoffman)은 동성애에 관한 글에서 말하기를, 성적 대상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학습된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인도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질병의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루이스(C.S.Lewis)는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였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동성애를 '부자연스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기독교는 동성애를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처럼, 사회 타락의 징조로 여겼다.
로마교회의 밀헤이븐(John G.Milhaven)은 주벽이 도덕적으로 좋지 않고 비기독교적인 것과 같이, 동성애도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동성애가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것은 기능을 오용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사랑을 거부하고 온전한 인간생활을 못하게 하는데 있다." 이러한 관점은 동성애의 잘못을 범하는 사람을 '큰 죄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동성애자들이 교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법에 의해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버나드 램(Bernard L.Ramm)은, 구속받은 자들의 코이노이아인 교회는 동성애자들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카알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개별적인 경우 우리들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 사랑과 목회적 분별력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 사회적 문제로서의 동성애
동성애가 보편적인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들은 일반적으로 동서의 성윤리의 주조가 이성애적 문화와 가치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경향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사회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던 까닭이기도 하다. 그 결과 동성애적 성향과 행위에 대하여 강한 징계적 거절의 입장을 뒷받침해 왔던 것도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동성애가 지니는 사회적 문제점들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우선 사랑과 가족에 대한 연관적 관점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다. 동성애의 경우 당사자간의 사랑의 관계는 있을 수 있다하여도 자녀의 출산과 부모로서의 양육을 통한 가족관계는 생기기 어려우므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관계에 위기가 온다는 점이다. 특히 리챠드 우즈 (Richard Woods)는 동성애주의자들의 노년의 정신적 상황에 대하여 가족관계의 단절, 가정의 상실, 그리고 후세와의 관계단절이 결과되는 점을 지적하면서 노년의 동성애주의자들이 세계로부터 소외되는 현실을 분석하였다. 둘째 문제는 결과적으로 이성애주의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주의자들의 비책임적 성관계는 신앙과 도덕적 삶이라는 차원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 하겠다. 동성애가 인간의 기초적인 삶의 제도로서 책임과 유대에 근거한 가정보다는 당사자간의 관계에만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책임한 성의 사용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결혼이나 가정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삶의 제도를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는 교회와 사회생활에 심각한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들이다. 넷째, 결혼 외 성적 관계의 유형으로서의 동성애는 다양한 문제들을 불러오고 있다. 왜냐하면 동성애 문제가 성향에 관계된 것이라면 이러한 성향을 극복하면서 신앙과 믿음으로 살기 위하여 독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적 욕망을 억압하는 것이 반드시 신앙적인 행위라고 볼 수는 없지만, 성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위를 유발해도 좋다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제3장 결론
카톨릭 교회가 합리적이라고 한다면, 프로테스탄트는 성서주의적이라 할 수 있고, 전자가 자연 중심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성서 중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가 모두 율법주의적이다. 율법주의의 정반대는 무율법주의다. 무율법주의자들은 인간이 자기의 행동을 결정함에 있어서 하등의 원리나 법률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베드로전서 2장 16절에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라.” 이렇게 자유의 면허를 받았으나 인간은 다시금 율법주의적 경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게 됨은 오늘날도 크리스찬들에게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성윤리에서 그러하다.
혼전 순결은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다. 인간의 성은 인격성 안에 통합되어야 하며,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속적이고 영적인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 진정한 인격적 연합과 사랑은 결혼밖에 없다. 성교는 결혼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이 사실은 종말의 날까지, 시대가 변해고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질서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많은 청년들이 이미 반 이상이 결혼전에 성경험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성문제로 힘들어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성교육과 상담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교역자들 스스로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르치기를 주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사료된다. 기독교 가정의 자녀교육은 아버지가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녀에 대한 1차적인 성교육도 부모가 해야한다. 그런데 부모가 스스로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자녀에게 할 말이 없다. 더구나 요즘은 이혼율의 급증으로 인해 혼전순결을 강조할 분위기가 전혀 아닌 가정들도 많다. 교회의 교역자도 이런 부모와 같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혼전 성관계를 무조건 정죄하기보다는 현실적인 대안과 교육이 필요하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다. 또한 사랑으로 용서하고 보듬어 주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다. 이는 교역자 및 교단적인 차원에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목회적 차원에서 동성애의 문제에 직면할 경우, 일방적 편견을 가지고 대해서는 안될 것이라 숙고된다. 동성애적 성향과 행위를 구별하고, 나아가 행위와 인격을 구별할 수 있을 때 보다 깊은 목회적 차원에서의 치유가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기독교 윤리학적 입장에서는 결코 어떠한 인간이라도 목회적 배려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동성애주의자들도 목회의 대상으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동성애 기독교적 가정관, 사회관, 성도덕의 관점에서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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