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서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주(Lord)로서 아는 것이다. 거룩한 방식으로서 그분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될 때, 우리는 그가 우리의 지식을 주관하시고, 그의 말씀이 우리 지식의 궁극적인 권위자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신학은 성경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응하는 것이다. 주경신학, 성경신학, 조직신학은 다양한 관점에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보는 것이다.
신학적 성찰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유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신학의 기본 개념은 신학이라는 용어의 어원, 즉 신에 대한 연구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정확한 정의를 찾아야한다. 기독교에서 신에 대한 연구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연구이다. 신학은 본질적으로 성경 연구가 되어야 한다. 신학은 프리드리히 슈라이어마허(Freidrich Schleiermacher)의 견해와 같이 인간의 종교 의식이나 감정에 대한 분석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이 어떻게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신학은 전도서의 히브리 본문 가운데에 있는 단어를 찾는데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4년전에 조직신학2를 수강하였고, 지난 학기에 조직신학1을 수강하였다. 조직신학을 수강하면서 느끼는 것은 한마디로 그 개념들이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한학기 동안이란 짫은 시간 내에 조직신학의 모든 영역을 소화하긴 물론 어렵다고 느낀다 . 아직 많이 부족함을 느끼지만, Final Paper 작성을 통해 그동안 배운 지식을 정리하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한다. 교수님께서 제시한 여러 Topic들을 놓고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였다. 고심끝에 나는 첫 단추부터 다시 끼우는 기분으로 첫 번째로 예시된 Topic인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제2장 본론
I. 신학에 관한 이해
- 종교의 본질
종교는 우리 모두가 다 이해하고 있는 체하지만, 우리들 가운데 실제로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그런 용어들 가운데 하나이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세계관과 인생관 즉 전체 현실에 대한 전망이나 전반적인 윤곽 그리고 이런 전망의 빛에서 개인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중세의 상당한 기간 동안에 종교는 신념이나 혹은 교리로서 생각되었다. 기독교를 유대교나 힌두교와 구분하였던 것은 상이한 신념들의 체계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개신교를 로마 가톨릭과 구별하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 되었던 것은 상이한 교리들(혹은 교의들)이었다. 심지어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도 주로 신적인 주권과 인간의 자유, 세례, 교회 정치의 구조 그리고 유사한 주제들의 각각의 역활에 대한 관념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생각되었다.
2. 신학의 정의
하나님에 대한 연구나 학문은 신학에 대한 훌륭한 예비적인 혹은 기본적인 정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활동하시는 존재이다. 신학은 하나님의 피조물, 특별히 인간과 그의 상태, 그리고 인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일관성있게 진술하려고 노력하는 이 학문은 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고, 일반적인 문화의 맥락 속에 놓여 있으며, 현대의 언어로 표현되고, 삶의 문제들에 관련 되어 있다. 따라서 신학은 성경적이며, 조직적이며, 현대적이며, 실천적이어야 한다.
II. 신학의 종류와 방법
1. 신학의 종류
전통적으로 신학은 종류별로 분류되었다. 주경(exegetical)신학은 성경을 절을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 주경신학은 적용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성경에 특별한 구절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성경(biblical)신학은 우리와 교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서 성경을 해설한다. 성경신학이 신학이라면 그것은 순수한 이야기일 수는 없다. 성경신학은 적용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신학은 청자들과 독자들을 위해 이야기가 갖고 있는 의미를 다루기 때문이다. 조직(systematic)신학은 전체 성경이 어떤 주제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 지를 물음으로써 성경을 적용하려고 한다. 예를들면, 조직신학은 다윗이 죄의 용서에 대해 언급한 것과 예수님, 바울, 요한의 경우를 연구한다. 또한 조직신학은 오늘날 우리가 죄의 용서 아니면 다른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가를 결정하려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될 때 조직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학문 분과가 아닌 매우 실용적인 학문 분과라 할 수 있다. 역사(historical)신학은 과거 신학 작업의 분석이다. 역사신학은 성경 가르침을 오늘날의 교회에 잘 적용하기 위해서 연구를 수행할 때, 참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이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면 역사신학은 곁코 신학이 아닌 단순한 다른 학문 분과일 것이다. 역사신학은 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과거 신학에 대한 교회의 연구로 정의한다. 실천(practical)신학은 조직신학의 한 분과이다. 실천신학은 조직신학의 다른 질문 가운데 성경에 대하여 특별한 질문을 한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가? 실천신학은 설교, 가르침, 복음 전도, 교회 개척, 선교, 통신 매체 등을 다룬다.
2. 신학의 방법
신학은 성경 중심적이어야 한다. 신학의 정의를 고려해 볼 때 이것은 명백하다. 우리가 성경을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항상 성경과 대화해야 한다. 우리가 한 가지 신학적 견해를 타당하게 주장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 견해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신학의 과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선 우리는 고대 언어와 문화에 관한 지식, 과거 신학자들이 문제를 다루어왔던 방법에 관한 지식, 현재의 신학 문헌에서 이용 가능한 다양한 대안에 대한 지식과 같은 성경 외적인 출처에서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 또한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철학, 문학 비평, 자연 과학과 같은 세석 학문에 관한 지식을 갖추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러한 일부 세속 학문은 성경 해석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다른 학문은 우리가 성경을 적용하려고 하는 상황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오늘날 신학 문헌의 주요 관심은 특별히 교리사와 현대 사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경 적용은 매우 뚜렷한 훈련이다. 성경 적용이 보조 학문에도 어느 정도 의존하지만, 이 학문 가운데 어느 것도 하나님 백성의 교화를 위해서 성경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학문적 탁월성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지식, 기도의 영, 사람들의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III. 하나님 말씀의 소통으로서의 신학
기독교 역사에서 종교개혁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문을 다시 열어준 매우 위대한 일을 하였다.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소통을 돕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 종교개혁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도 더 밝히 보여준 매우 중요한 일도 했다. 오늘의 신학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현장과 소통의 문제를 절대 무시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성경을 기반으로 한 바른 신학과 바른 소통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1.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우선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이다. 이 정의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라는 위대한 화란계 기독교 철학자요, 신학자요, 평론가요, 정치가이며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의 설립자가 정리한 것이다. 카이퍼의『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에서 그는 칼빈주의가 신학의 시스템이 아니라 철학, 예술, 정치 모든 문화에 대한 적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명언은 우주 안에 1제곱 인치의 땅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다”(This is mine)라고 말하지 않은 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알 수 없지만(incomprehensible), 또한 인식할 수 있는(knowable) 분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떄문이다. 우리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오셨고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 알 수 없는 그분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를 주로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내가 주(여호와)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계속 말씀 하신다(출14:18; cf33:11-34; 왕상8:43; 대상28:6-9).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에 대해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집약된 내용이다.
하나님을 주(Lord)로서, 왕으로서 점점 더 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자라난다. 첫째로 그분은 만물을 통치하는 분이시다. 둘째로, 순종해야만 하는(must) 권위를 가지고 모든 영역, 즉 사회적 삶, 도덕적 삶, 심지어 지적인 삶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로, 삶에서 그의 임재를 더욱 느낄 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 어떠한 것도 하나님이 보지 못하시는 가운데 할 수 없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지식으로 인도한다. 순종하는 마음이 첫 번째이고 지식은 두 번째이다. 지식과 순종은 나선형 관계이다. 즉 더 많은 순종은 더 많은 지식을 낳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학을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보았다. 즉 주님으로서 그를 아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적 반응에서 우리가 살아 움직이고, 우리 존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그를 아는 것이다.
2.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훈련된 연구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훈련된 연구이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학(theology)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갖는 생각이다. 프리드리히 슈라이어마허(Freidrich Schleiermacher)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최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성경 외의 기준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을 “기독교 교리는 언어(speech)안에서 규정된 기독교 종교적 감동에 대한 설명”이라고 정의 하였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신학이 종교적 감상이나 감정의 작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확실한 방향을 느끼고 그 후에 감상을 말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슐라이어마허가 본 신학이며, 이러한 관점을 주관적 관점(subjectivist view)이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정의는 사뭇 다르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고견을 가졌고, 성경을 신학적 진술들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로 보았다. 신학은 “적당한 질서와 관계 안에서 성경의 사실들을 보여주는 것”(exhibition)이라고 핫지는 말했다. 핫지의 정의는 슐라이어마허의 것보다 훨씬 낫다. 핫지의 정의는 신학을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객관적 관점(objective view)라고 한다.
신학은 세상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말씀의 적용이다. 성경에 부적절한 형식이나 어떤 문제가 있어서 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 느리다는 것이다. 모두 우리의 연약함과 죄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설교자처럼 신학자는 성경 본문을 취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설명한다. 성경의 목적은 부분적으로 주관적이다. 현재의 상황과 문제를 다루도록 돕는다. 신학은 적용이다.
신학은 훈련된 연구로서, 하나님의 지식으로서 신학의 부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훈육, 즉 우리의 종됨(servanthood)의 부분이다. 훈련된 연구로서 신학은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자와 그가 섬기는 자들을 위한 영적인 성장의 도구로서 지식을 추구한다.
제3장 결론
신학의 기초는 계시와 신앙이다.계시와 신앙을 알기 위해서는 신학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신학의 주체시면서 신학의 대상이시다. 신학에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전통적 분류 방법에 의하면 주경(exegetical)신학, 성경(biblical)신학, 조직(systematic)신학, 역사(historical)신학, 실천(practical)신학 등이 있다.
신학은 창조된 세상에 관한 성찰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현시에 기인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기독교에서 신에 대한 연구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연구이다. 신학은 본질적으로 성경 연구가 되어야 한다.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이다. 결국 신학은 신앙의 학문적 이해이다. 신학은 신앙 안에서 태어나고 신앙 안에서 자라고 신앙 안에서 완성된다. 신앙은 계시로부터 솟아나오며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된 자기 이해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학문적 이해가 신학인 것이다. 신학은 신앙의 대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성의 힘을 취하는 신앙이다.
좋은 가르침은 하나님 말씀의 타당한 전달이기 때문에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신학자가 다른 교사나 설교자보다 불오(infallible)하며 무오(inerrant)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신학자는 신학의 적절한 작업을 수행할 때 성경의 적용을 자신의 목적으로 갖는다. 이 작업을 잘 수행할 때 그는 성경 내용을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신자들의 마음과 가슴에 새겨 넣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신학은 성경 저자 친필 원문(the autographic text)의 전달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훈련된 연구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 문헌
1. John M. Frame(김용준 역), 『조직신학 개론』, 서울 : 개혁주의신학사, 2017
2. John M. Frame(김진운 역), 『성경론』, 서울 : 개혁주의신학사, 2014
3. 강철홍, 『복음의 사람』, 서울 : 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15
4. R. C. Sproul(조계광 역), 『모든 사람을 위한 신학』, 서울 : 생명의말씀사, 2015
5. Millard J. Erickson(신경수 역), 『복음주의 조직신학』, 경기도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